2009년 10월 16일 금요일

윤동주의 후쿠오카형무소살이 증언

詩人/作家/시와산문 2008/02/10 20:22 청산(靑山 Paul)

 
 윤동주    윤동주 묘비 옆의 ...  레터링 / 서시-윤동주 ...  세상에 :: 윤동주 ...  윤동주  ... 윤동주 시인 사진 이   윤동주, 일제 생체 ...

 

김헌술 씨(1977년 정부에 의해 독립유공자 포상)가 증언한 후쿠오카형무소의 옥살이 증언은 이렇다.

김헌술 씨는 교토중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1942년 8월, 18세의 나이로 교토유학생사건에 관련되어 일경에 체포돼 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1943년 6월에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되어 1944년 9월에 만기출옥할 때까지 있었는데, 그때 복역 중인 운동주를 보았다고 한다.
당시 사상범들은 모두 독방에 가두었는데, 그는 北3舍 48호 독방에 있었고 윤동주는 복도 맞은편인 108호 밀폐형 독방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윤동주 지사를 처음 본 것은 1944년 초여름의 오후, 맞은편 감방에서 죄수가 새로 옮겨오는 기척이 들려서 간수들이 감방 안을 들여다 보는 감시구를 통해 복도를 내다보니, 청년 하나가 얇고 푸른 이불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그 위에 베개 하나 밥통 하나를 얹어들고 간수의 지시에 따라 맞은편 108호 감방 안으로 들어가더라는 것. 간수가 철문을 잠그고는 사상범임을 표시하는 '嚴正'(엄정)이란 패찰을 문 옆에 꽂아놓은 후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그 후 운동 시간에 모두들 밖으로 나가는 기회에 간수의 눈을 피해 108호의 젊은 죄수와 통성명을 했는데 ″교토 동지사대학의 윤동주″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

(1) 생체실험 이야기
윤동주 지사와 첫인사를 나누기 전, 1942년(1943년의 오식) 겨울에 나는 이상한 일을 경험했다. ...간수가 와서 문을 열고 나오라한다. 나는 예의 형무소장의 면담인가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던일을 일(목장갑이나 목양말의 코를 꿰는 실내작업노역)을 멈추고 간수를 따라 복도에 나갔다.
이방 저방에서 몇 사람이 나오고 그들과 함께 간수를 따라 중앙 광장에 나가자 몇 사람이 이미 나와 서성거리고 있었다. ...

김제옥 조희달 그리고 교토유학생사건의 지도자 양인현 선배 이원구 동지와 나는 간수가 없는 틈을 이용해 통성명을 전격적으로 끝냈다. 간수가 와서 우리 5명을 포함, 죄수 일행을 병감病監으로 인솔했다.
우리가 의무실로 들어서니 옥의獄醫가 나무의자를 가리키며 모두 앉으라고 했다. 인텔리였던 옥의는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주었다. ″조선이 독립되겠나? 전도양양한 준재들이!″ 하면서 휘 우리를 둘러버고 안됐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개업을 하다 군의관으로는 나이가 많아 옥의로 징발되어왔다고 자기 소개를 하기도 했다.

잠시후 그 옥의는 우리들에게 암산 용지를 2-3장씩 주면서 일정 시간에 암산을 해서 연필로 답을 적으라고 했다. 암산 용지에는 간단한 가감산 문제가 수백 개 가량 나와 있었다. 우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열심히 암산으로 답을 써 내려갔다. 5분 가량, 지났을까? 옥의는 ″그만″ 하더니 답안지를 거두었다.
이때 구우슈우의전생이었던 조희달 선배가 나도 의학을 배운다 왔는데 ″이것은 무엇하려고 하느냐?″고 독특한 큰소리로 옥의한테 질문을 했다. 옥의는 웃으면서 ″다이시다고도 나이요(별다른 일은 아니다)″ 하며 주사기를 꺼내 5-10cc 정도의 주사액을 넣고는 우리들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이때 우리들은 이게 무슨 주사며, 무엇 때문에 맞는지 몰랐다. 불가사의한 일이 진행되고 자신의 신체에 이물질이 들어가는 순간에 아무런 저항 없이 팔을 내밀고 주사를 맞았다. 물론 나도 뼈만 남은 팔을 걷어올리고 주사를 맞아야 했다.

우리들은 일주일 이상 주사를 맞았다. 주사를 맞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자, 암산 능력이 거의 반으로 떨어졌다. 1주일이 지나면서부터 암산 능력이 더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오답도 많아졌다. 우리는 이것을 생체시험이라 불렀다.



(2) 윤동주에 대한 증언

김헌술 씨의 증언이 이어졌다.

형무소의 감방문은 하루 5번 정도 열린다. 이침 청소 묵상 식사 변기 교환 운동. 그리고 며칠 만에 한 번 씩하는 목욕. 작업 원료의 반입 반출 때에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데, 변기 교환이나 운동 목욕시에는 수인들이 복도에 나가야만 된다. 특히 변기 교환은 매일 빠짐없는 일과였다. 하루동안의 배설물을 본인이 직접 들고 복도 한 가운데에 가져다 놓고, 포르말린이 들어 있는 새 용기를 갖고 들어온다. 이때 수인들끼리 가가운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볼 수 있다.

변기 교환 시간에 유 지사를 매일 보아야 했었지만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그것은 윤 지사가 변기 반출에 시가닝 오래 걸려 어긋나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윤 지사는 몸이 좋지 않은 듯 변기를 신속히 움직이지 못했다. 변기는 왜인들이 일상시에 쓰는 간장통이나 술통 같은 형태로 나뭇조각을 이어 만든 것인데, 건강한 사람이라면 두 손으로 거뜬히 들 수 있다. 윤 지사는 그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힘들게 변기를 복도 중앙에 갖다 두고, 윤 지사는 주위를 둘러버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버리곤 했다.

윤지사의 얼굴은 붉은 색을 띠고, 말하자면 상기된 때가 많았다. 옥중생활을 오래하면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 정상인데 붉은 색을 띠면 身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미열이 아니고 상당한 정도의 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기를 교체하다 어쩌다 윤 지사와 눈이 마주치면, 잠시 쳐다보곤 아무 표정도 없이 방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인사까지 나누고 통성명을 했는데도 만사 귀찮다는 표정 같았다. 空과 虛를 윤 지사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윤 지사는 훤출한 키에 상하 균형이 잘 잡힌 체격이었다. 頭像은 이마가 넓고 약간 앞으로 튀어나온 듯 했고, 얼마나 여위었는지 관자놀이뼈 밑은 삼각형의 예각을 그리면서 턱은 뾰족한 편이었다. 당시의 학생 사상범 출신들이 모두 그러하듯 윤 지사에게도 선비 기풍이 풍기고 범하기 어려운 근엄함이 엿보였다.

목욕을 하는 날에는(왜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목욕이라서 그런지 죄수들에게도 수일에 한 번씩 목욕을 꼭 하게 했다) 감방안에 옷을 벗어놓고 발가벗은 채 수건 하나만 들고 복도에 모였다가 목욕탕을 향해 줄을 지어 걸어나간다. 우리는 이것을 '해골행진'이라 불렀다. 윤동주 지사의 해골행진은 참으로 참담했다. 큰 체구에 뼈대가 굵어서인지 어깨 양팔 다리 가슴 부위의 뼈가 그대로 드러나 마치 뼈에 가죽을 입혀놓은 듯했다. ...

아침 5시에 기상(겨울에는 5시 30분)하여 마루바닥을 물걸레질로 청소하고 난 후 정좌하여 30분간의 묵상을 하고 나면, 간수부장의 각 방 점검이 시작된다. 간수가 각방의 철문에 달려 있는 자물쇠의 손밥이를 덜커덕 잡으면서 ″번호″ 하고 소리치면 안에 있는 죄수는 정좌하고 있다가 간수를 향해 큰 소리로 자지 번호를 외쳐야한다.

나의 번호는 257번이었는데 윤 지사으이 번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윤 지사으이 번호 복창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너에 있던 윤 지사의 복창소리는 모기소리 같은 갸냘픈 소리였다. 오랜 기간 복역한 사람이 기력이 있을 리 맘무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윤 지사는 더욱 허약해 있었다. 윤 지사는 걸음마저도 휘청거릴 정도였다.
...
108호실의 윤 지사는 아침운동에도 나오지 않는 날이 더러 있었다. 딴 곳으로 이간했나 하고 그 방의 동태에 촉각을 세웠는데 간혹 인기척이 있고, 때때로 밥지꺼기가 남아서 나오는 것을 보니 분명 사람이 있었다. 어는 날 복도에 108호실의 죄수가 복도에 변기를 내놓고는 곧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을 뒷모습을 확인했는데, 분명 윤동주 지사였다. 그 모습을 보고 ″많이 안됐구나″하는 혼자소리를 내기도 했다.

아침 점감 때의 일이다. 108호실에서 소동이 났다. 간수가 황급히 문을 따고 108호실로 들어가고 뒤이어 의무실에서 사람이 왔다. 잠시 후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기상하여 정좌하고 있어야 할 윤 지사가 운신을 할 기력마저 잃었던 모양이다. 저렇게 되어도 병감에 옮겨주지 않으니, 가혹한 형벌을 저주할 수 밖에. (김헌술 씨 증언 끝) ('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2004년 재개정판 도서출판 푸른역사 527쪽-531)
윤동주 평전 송우혜 ...

청산 註: 윤동주 시인의 연보에 의하면 윤 시인은 1943년(27세) 7월 14일 독립운동 혐의(치안유지법 제 5조)로 일본 특고경찰에 검거되어 1944년(28세) 2월 22일에 기소되어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 2형사부는 징역 2년을 선고, 윤 지사는 후쿠오카형무소로 이송되어 복역 시작했다. 윤 시인은 출감 예정일 1945년 11월 30일까지 9개월 정도를 남긴 채 1945년(29세)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108호실 감방안에서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 운명했다(간수 증언). 사진은 도쿄의 릿꾜대학 입학후 한 학기 시절의 윤동주 시인 모습. 교복 칼라에 릿꾜대학을 표시하는 알파벳 L이 부착돼 있다. 머리가 짧은 것은 그 당시 다른 대학과는 달리 유난히 교련을 강화한 그 학교의 방침대로 짧게 깍아야 했단다. 본인이 일본에 거주할 당시 릿교대학에 가고자 했으나 여의치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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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산(靑山 Paul) 2008/02/11 11:42

    제이제이: 이 평전은 제가 소중히 여기는 책 중의 하나지요. 청산 선생님이 올려주신 내용으로 미뤄볼때 동주시인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여러번 읽었던 내용인데도 가슴이 너무 아프네요. 2008-02-11


    blue: 그렇지요. 저의 가슴도 무척 아프군요. 그래서 안 읽으신 분들을 위해 이렇게 글로 소개라도...
    일본에 도쿄에 있을 때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윤 시인을 추모하는 모임이 있다기에 내려가고 싶었는데 여의치 못해서 그만 두었지요. 그 증언을 읽고 그 당시 재일 한국 청년 학생들의 애국심과 희생을 더 중히 생각하게 됐습니다. 200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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