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날
R.M. 릴케
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 주옵소서.
마지막 열매를 알차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녘의 빛을 주시어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
마지막 단맛이 무거워져 가는 포도에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자는 집을 짓지 못합니다
지금 홀로 인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살 것이며
잠자지 않고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바람에 나뭇잎이 구를 때면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사이를 헤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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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유감*
청산
가을 햇빛은 슬프게
내 눈 속으로 자취 없이 젖어들고
뒤돌아보면 쉬지 않고 흘러가는 날들이
잔잔히 내 발자국 위에서
하나, 둘... 고독으로 변신한다.
홀로 제각기 살아가는 세상에
진실하고 황홀한 모습으로 물든
단풍잎들을 바라보면서
내 젊은 날의 빛바랜 노트장에 적혀 있는
단풍을 읽는다.
붉게 풍을 떠는 몸부림으로
내 눈이 멀도록 타라!
이 세상 가슴 가진 자,
그 마음을 온통 사르는 불꽃.
단풍아!
겨울이 오기 전에
이 숲을 태워라!
나는 裸木이 되어
달빛 속에서 가을 소나타를 들으며
요정 따라 춤을 추련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음악과 고독
한 잔 술이 있는 곳 -
정담이 오가는 단풍 숲에서
나는 한없이 사랑하고 머물고 싶다.
*<詩文學> 281호, 1994. 12. 1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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