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5일 일요일

1884~1885년의 조선朝鮮 - 1

1884~1885년의 조선 - 1  

etc/스크랩 및 퍼온 글 2009/09/24 14:23 이충렬(yigura)

미국 위스콘신대 밀워키 도서관 웹사이트에 가면 우리나라 근대의 모습이 담겨있는 43점의 사진 이미지가 소개되어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1884년 6월부터 주한미국영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하다, 푸트(Foote) 초대공사가 떠난 뒤 20개월 동안 임시로 공사직을 대행했던 대리공사 폴크(George C. Foulk 福久 1856~1893)다.  영문 성이 'Foulk'이니 폴크라고 불러야 맞는 것 같은데, 그를 소개하는 우리나라 글에서는 포크라고 표기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근대의 주한미국공사 폴크와 포크는 같은 사람이다.  




폴크는 우리나라에 3년 동안 근무하면서 많은 사진을 찍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 있는 부모님께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 오른쪽 책이 그 편지를 소개한 <조선에 온 미국인>이다.

폴크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인물이 아니다. 선교사로 왔다가 훗날 주한미국공사를 역임한 알렌의 '견문기'에서, 폴크는 1884년 제물포에서 한양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고 이를 본 조선인들이 벌린 입을 닫을 줄 몰랐다, 라고 기록했다.

정성화와 로버트 네프가 지은 <서양인의 조선살이 1882~1910> (푸른역사 발행)에 보면, 그가 대리공사로 재직하던 1886년 1월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더니 수 백 명의 조선인이 구름떼처럼 주변에 몰려들었고 이튿날에는 거의 2000명의 구경꾼이 왔다, 라는 기록도 있다.

그렇다고 그가 무관이나 외교관의 임무를 소홀히 한 건 아니다. 그는 서양식 병원을 설립하고 싶다는 의료선교사 알렌의 청원을 고종에게 전달해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이 문을 열게 하는 외교적 수완도 발휘했다.

아울러 정보수집의 의무가 있는 무관답게 조선지도도 구하고 한양과 지방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 미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 중 일부 사진은 자신이 간직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유족이 위스콘신대학교 도서관에 넘겼다. 위스콘신대학 자료에 의하면 구입했다고 했으니, 판 것이다.

그가 찍은 사진 뒷면에는 촬영 날자와 장소가 기록되어있다. 정보수집 담당자다운 꼼꼼함이고, 이 기록으로 그가 찍은 사진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공사 관저에서 일하던 소년이다. 정확한 촬영 날자는 없고 1884~1885년이라는 기록이 도서관 서류에 있다. 폴크는 이 소년의 이름을 "Bob"이라고 기록했다. 원래 이름이 부르기 어려워, 부르기 쉬운 애칭을 만들어 준 것이리라. 현재까지 발굴된 기록에 의하면 이 소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미국 이름을 가진 인물이다.  
 



사진 한 장 찍자고 하니까 긴장해서 포즈를 취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한 걸로 봐서, 부지런한 소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추 1870년생쯤 되었을 테니, 140년 전 쯤에 태어나신 분이다....  




1885년 5월 31일 북한산에서 활쏘기를 하는 광경을 찍은 사진이다.  (이 건물의 위치와 이름을 아신 분은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사진 아래 기록으로 볼 때, 훈련대장이 참석한 활쏘기 시범일 가능성이 많다.



"북한산 부근의 정자"라는 표기가 있으니 세검정일 가능성이 많다. 만약 세검정이라면, 1941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의 모습이다. 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 5월에 복원된 건물이다.




정동 언덕에 있던 미국공사관 건물(현재 미국대사관저) 뒤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에 광화문이 보이고 그 뒤로 근정전과 경회루가 보인다.  그리고 13년 후, 폴크가 이 사진을 찍은 이곳에서  장소에서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는 <미국공사관에서 본 서울풍경>이라는 그림을 그린다.


휴버트 보스 <미국공사관에서 본 서울풍경> 부분도,  캔버스에 유채 31 x 69cm 189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이 궁금하신 분은  -->  http://www.jpnews.kr/sub_read.html?uid=1085



남산에 올라가서 찍은 한양 전경이다. 당시에는 이렇게 상대국 수도의 지리와 환경을 알 수 있는 사진을 열심히 찍어 본국에 보내는 것이 무관의 임무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왼쪽 희미한 길이 광화문으로 가는 길, 오른쪽 길이 광교에서 안국동 쪽으로 가는 길인 것 같다...




남산에서 내려오면서 당시 존재했던 성벽과 숭례문을 찍은 사진이다.




성 밖에는 거의 초가집이었다.....




숭례문 가까운 곳에서도 찍었다....  가장 중요한 성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숭례문 동쪽에서 성벽의 규모를 찍은 사진이다.....




"서대문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설명이 있다...  역시, 무관의 사진이다..... 길 가운데 영은문이 보인다...







       김영택 <영은문> 종이에 먹펜, 36×50cm 2007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문이다.  그러나 1895년 2월 철거하고 독립협회 주도로 독립문을 세웠다.




"서울의 북부"라는 설명이 있다.




창덕궁인지, 창경궁인지.... ??



원남동 부근에서 명륜동 쪽 부근인지??

미국 공사관 무관 덕분에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반갑기는 한데, 사진 촬영의 목적이 정탐용일 가능성이 많으니 마냥 반가워하기도 거시기 하고....  

암튼 오늘은 여기까지하고 며칠 후에 나머지 올릴 예정이다~~~~  ^&^


-----------------------------연재 광고 <그림으로 보는 근대풍경>-----------------------------

이상과 김환기 그리고 변동림과 김향안

이상은 구본웅이 초상화를 그려준 2년 후 일본의 병실에서 스물일곱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때 이상의 침대 옆에서는 그와 결혼한 지 4개월 된 아내 변동림(1916~2004) 이 임종을 지켰는데, 구본웅의 손아래 이모다. 따라서 이상은 4개월 동안 구본웅의 손아래 이모부였다.

--중략--

7년 후, 변동림은 서양화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때 이복언니인 변동숙은, 본부인이 있고 자녀가 셋이나 있는 김환기의 첩살이를 하는 건 결국 본부인을 내쫓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며 극력 반대했다. 그러자 변동림은 변 씨 가문과 인연을 끊겠다며 성과 이름을 김향안(金鄕岸) 으로 바꿨고, 얼마 후 김환기는 본부인과 이혼했다.

근대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현대미술사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수화 김환기는 이렇게 구본웅의 손아래 이모부가 되었다.



http://v.daum.net/link/4273731

http://www.jpnews.kr/sub_read.html?uid=1791

<제이피뉴스>에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근대를 연재하고 계시는 이충렬 선생님의 블로그 "내가 만난 그림, 내가 만난 세상"에서 퍼 왔습니다. 옛날 사진만 보면 왜 이리 알싸해지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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